처음엔 두 단어가 그렇게 큰 차이를 만드는지 몰랐다. 조약이든 협정이든, 서명하고 악수하고 발표하는 걸 보면 비슷하게 느껴졌다. 뉴스 자막에선 종종 둘을 번갈아 쓰기도 했고, 전문가들도 대체로 같은 의미처럼 이야기하는 때가 있었다. 하지만 실제 사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둘 사이의 거리가 뚜렷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나에게도 그런 지점이 있었다.

외교 현장을 처음 들여다봤을 때의 낯선 느낌
외교문서라는 게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하고 딱딱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떤 국제회의의 비공식 기록을 들여다볼 기회가 생겼고, 그 속엔 꽤나 사람 냄새나는 문장들이 있었다. 참석자들은 한 줄짜리 문구를 놓고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았고, 어떤 문서를 '협정'으로 부를지 '조약'으로 부를지를 두고도 수 시간씩 논쟁했다.
그중 기억에 남는 장면은, 환경 관련 문서 하나를 조약으로 체결하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였다. 한쪽에선 “그렇게 하면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다”라고 말했고, 다른 쪽은 “조약이 아니면 실행력이 떨어진다”라고 맞섰다. 종이에 적힌 내용은 그대로인데, 거기에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그 책임의 무게가 바뀐다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다.
사실 어떤 약속이든 본질은 비슷할 수 있다. 다만 그 약속을 어떻게 문서화하느냐, 어떤 형식을 거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경로를 걷게 된다. 나는 그 회의장을 떠나면서, 조약과 협정이라는 말이 단지 단어가 아니라, 정치적 전략이자 외교적 계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단어가 경계를 정하고, 경계가 태도를 결정한다
얼마 전 국제사회의 시선을 끌었던 사건 하나가 있었다. 한 국가가 체결했던 합의문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논란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 문서에는 조약이라는 단어 대신 협정이라는 표현이 사용돼 있었다. 그 때문에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근거가 모호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문장 하나 바꿨을 뿐인데, 국가의 입장이 그렇게 갈릴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이전에는 그런 표현상의 차이를 큰 틀에서만 이해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례를 접하면서, ‘조약으로 불리는 문서’와 ‘협정이라 불리는 문서’는 그 작성 의도부터 작동 방식까지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됐다.
예를 들어, 교육이나 문화 같은 분야에선 비교적 가볍고 조정 가능한 문서가 선호된다. 반면 안보나 경제 문제처럼 국가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닿는 사안에선 형식이 훨씬 까다로워진다. 이때 조약이라는 이름은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태도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까 조약은 “이건 한 번 정하면 그대로 간다”는 의미를, 협정은 “우선 합의하고 조정해 가자”는 여지를 남기는 구조랄까. 물론 이 구분이 항상 명확한 건 아니다. 현실은 훨씬 더 유동적이고, 어떤 경우엔 일부러 그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선택도 존재한다.
나중에 남는 건 문장이 아니라 신뢰였다
어떤 협상이든 끝은 문서로 남는다. 하지만 그 문서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는 그 문서를 만든 사람들이 가진 신뢰의 정도에 달려 있다. 조약이라 불러도 무시되는 경우가 있고, 협정이라 해도 끝까지 지켜지는 예도 있다. 그래서 문서의 명칭보다 중요한 건, 그 문서가 만들어진 배경과 과정이다.
나는 조약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사례와, 협정이었지만 훌륭히 이행된 사례들을 동시에 본 적이 있다. 전자는 제도적 장치만 있었고, 후자는 사람 간 신뢰가 있었다. 결국 조약이든 협정이든, 그 말의 무게를 지키려는 자세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는 걸 느꼈다.
요즘은 회의록을 읽을 때 문장의 구조만 보는 게 아니라, 그 말들이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졌는지를 먼저 살펴보게 된다. 겉으로 보기엔 비슷한 내용이라도, 국가들이 감당하려는 수준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조약이라는 단어가 너무 강해서 서로 물러서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때는 협정이 가진 유연함 덕분에 관계가 이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차이는 책으로 배우기보단, 현실의 어긋남 속에서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조약과 협정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구분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가 책임질 수 있는 범위와, 그 약속을 받아들이는 자세의 차이를 드러낸다. 진짜 차이는 문서 바깥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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