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은 국제법이 나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법이라는 말 자체가 뭔가 전문가들만 다루는 분야 같기도 했고, ‘국제’라는 단어가 붙으면 더더욱 내 일상과는 멀리 있는 개념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뉴스로 접할 때마다, ‘저런 일이 벌어졌을 때 법은 어디에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게 전쟁이든, 환경 문제든, 해외에서 체포된 누군가의 이야기든 간에, 모두 다 ‘국제적 법의 감각’과 연결되어 있었다.
누군가에게 법은 종이 위에 있었고, 누군가에게는 삶이었다
대학 시절, 국제법이라는 과목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교과서 속에 적힌 조약이나 판례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조약문 하나를 해석하는 데에도 여러 관점이 존재했고, 강제성이 없다면서도 나라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왜 그럴까?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법들이 지켜야 했던 건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국가 사이의 신뢰였던 것 같다.
한 강의 시간, 교수님이 전쟁 중 민간인이 피난을 가다가 공격을 당한 실제 사례를 보여주셨다. 그 장면은 머릿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냥 뉴스로 넘겼겠지만, 그 피해자에게는 법이 단순한 ‘규정’이 아니었다. 그들은 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에 고통을 받았고, 그들의 삶에 필요한 건 말뿐인 조약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보호’의 장치였다. 국제법이라는 개념은 그날 이후, 내게 훨씬 무게감 있게 다가왔다.
경계 위에 선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경계 밖의 법이 필요해진다
요즘처럼 국경이 무의미해진 시대는 이전과는 확실히 다르다. 친구가 해외로 나가고, 직장 동료가 외국 회사에 입사하고, 누군가는 국제 결혼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해외에서 억울한 상황을 겪는다. 그때마다 우리가 기댈 수 있는 법은 꼭 우리나라 법만이 아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을 위한 보호 장치, 그것이 바로 국제법이 해야 할 역할이 아닐까.
실제로 나는 해외 체류 중 아는 지인이 현지 경찰에게 부당하게 대우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외교부가 개입했고, 해당 사건은 외교적 경로를 통해 조정됐다. 이 일은 나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국제법이라는 게 거창한 외교 협상이나 국제 회의 속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닿을 수 있는 법적 망이라는 걸 그제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국경을 넘는 일이 많아질수록, 법의 역할도 변하고 있었다
몇 해 전, 환경 이슈로 떠들썩했던 국제 회의가 있었다. 기후 문제로 인해 여러 나라가 모여 의견을 조율하는 자리였는데, 각국의 입장은 달랐고 책임에 대한 해석도 엇갈렸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끈질기게 유지되던 건, 각국이 ‘법적 합의’를 도출하려는 노력이었다. 이걸 지켜보며, 나는 ‘합의’라는 것이 단순한 타협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지켜보며 정해가는 일종의 공동 선언처럼 느껴졌다.
국제법은 점점 더 기술, 환경, 인권, 사이버 공간 등으로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더 이상 총을 든 국가만이 아니라, 데이터를 가진 기업, 서버를 운영하는 개인, 가상의 공간에 존재하는 피해자까지도 그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법이 현실을 따라가지 않으면, 현실은 법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함께 느껴졌다.
외우는 법보다 ‘느끼는 법’이 먼저여야 했다
한동안 국제법을 공부하면서 조약명을 외우고, 조문을 해석하고, 각국의 입장을 비교하느라 책상 앞에만 앉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진짜 필요한 건 그 내용을 암기하는 게 아니라, 그 법이 왜 존재하는지를 감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지켜지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는 규칙’, ‘믿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 약속’, ‘문장보다 사람의 삶이 우선인 기준’ 국제법을 그렇게 다시 정의하게 됐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우리가 그 법을 처음 배운다는 건, 세계를 더 잘 살아가기 위해 내가 누구를 보호하고 싶은가를 먼저 생각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국제법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와 국가 사이에 있는 말 없는 합의이자, 경계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무언의 보호망이다.
그 법은 누군가의 삶이 무너졌을 때, 최소한의 틀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한다. 지금 우리가 국제법을 이해하려고 하는 건, 결국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과 책임의 방향을 정하는 과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