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시작되면 모든 것이 뒤바뀐다.
거리의 풍경도, 사람들의 대화도, 매일의 리듬도.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와중에도 어떤 것은 지켜지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병원이 무너지지 않기를, 아이들이 공격받지 않기를, 구조대가 막히지 않기를.
어쩌면 그 바람은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비현실’을 종이에 써서 공식적으로 말하고, 누군가는 실제로 그것을 따르려 한다.
나는 그런 모습에서, 법이 단지 명령이 아니라 ‘믿고 싶은 최소한’이라는 걸 느꼈다.
모두가 무너질 때, ‘적어도 이것만은’ 하고 남긴 문장들
전쟁은 혼란이다.
누구의 명령이 옳았는지, 어떤 목표가 정당했는지 따지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된다.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도 이상하게 자주 등장하는 장면들이 있다.
어느 병원 앞에 걸린 표식, 구호기구 차량에 붙은 상징, 학교 벽에 남겨진 어떤 문구.
그런 것들은 마치 전쟁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곳만큼은 지켜져야 한다”는 일종의 사인처럼 보인다.
나는 한 다큐멘터리에서 본 장면이 기억난다.
분쟁 지역의 구호소 앞, 무너진 벽 틈 사이로 희미하게 그려진 표시가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공격 금지’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곳은 실제로, 인근 건물과는 달리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그게 우연이든 의도든, 나는 그 장면에서 어떤 신념 같은 것을 느꼈다.
폭력이 모든 걸 덮어버리는 와중에도,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실제로 작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렇게 남겨진 선은 결국,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역할을 한다.
그곳이 어떤 건물인지, 어떤 사람들인지를 고려하는 선택.
그리고 그런 선택이 쌓일 때, 법이 실현되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종이 위 조항이 아니라, 누군가가 실제로 멈추는 선택을 하는 것.
그게 진짜 법의 시작점이었다.
너무 당연한 말’이 현실에선 가장 어려운 요청이 될 때
아이를 공격하지 말 것.
부상자는 치료할 것.
의료인은 보호할 것.
피난 중인 사람을 겨누지 말 것.
이 말들은 말 그대로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하다.
누구도 반박하기 어려운 문장들이다.
하지만 전쟁의 한복판에선 이 문장들이 오히려 가장 지키기 힘든 요청이 된다.
어떤 지역에서는 구조 활동을 위한 길을 내달라는 요청이 계속 거절됐다.
어느 날은 구호품이 도착하기 전날 길이 봉쇄되었고,
또 어떤 날은 병원이 운영을 중단한 직후 폭격이 있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며, 나는 ‘누군가는 일부러 어기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법이 무력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그 문장들은 지워지지 않는다.
심지어는 전쟁을 수행하는 쪽조차 ‘우리는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겨냥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그 문장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법의 효력이다.
법은 명령이 아니라 ‘누가 먼저 틀렸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전쟁이라는 극단의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이 그 기준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여전히 인간적인 세계에 속해 있기를 바란다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남겨야 하는 것은 승리보다 기억일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나면 수많은 것이 사라진다.
건물, 거리, 사람, 제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남는 게 있다면, 그것은 ‘기록’이다.
무엇이 지켜졌고, 무엇이 무너졌는지 남긴 기록.
그리고 그 기록 속에서 ‘지켜졌어야 했던 기준’들이 반복된다.
나는 그런 기록의 가치에 주목하게 됐다.
법은 단지 현실을 조율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현실이 무너졌을 때에도 기억을 지켜내기 위한 언어일 수도 있다는 생각.
그 기준이 없었다면, 모든 행동은 그냥 ‘상황의 결과’로만 남았을 것이다.
어떤 병원은 마지막까지 문을 닫지 않았다.
의료진은 그곳에 남았고, 환자들도 함께했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믿는 게 있다"라고.
그 믿음의 이름은 어쩌면 조약이나 협약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남긴 건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지켜야 했지만, 지켜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나는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법은 현실을 바꾸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현실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기억을 붙들기 위한 약속일 수도 있으니까.
지켜야 할 최소한이라는 말은, 결국 사람이 지키기로 결정할 때에만 살아난다.
법은 종이보다 먼저, 선택에서 시작되고 행동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 흔적은 언젠가, 무너진 현실 위에 가장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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