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는 왜 조약에 법적 구속력을 둘까?
나는 한동안 조약이라는 단어를 '국가 간 협정' 정도로만 이해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뉴스에서 "한미 FTA 협정이 체결됐다", "파리기후변화협약에 서명했다"는 식의 문장을 수없이 들어봤지만, 그 문서들이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까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조약이 단순한 약속 이상의 무게를 갖는다는 걸 깨달은 건, 분쟁 상황에서 ‘조약 위반’이라는 말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오는지를 본 이후였다. 그제야 묻게 되었다. 서명만으로 세계가 구속되는 이 조약이라는 것은 도대체 왜 이렇게 강력한가?
종이 한 장에 얽힌 나라들의 신뢰와 두려움
조약은 본질적으로 합의다. 두 나라 이상이 어떤 공통된 목적을 위해 조건을 설정하고, 서로 이를 지키기로 약속하는 문서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문서가 아무런 강제력이 없는 경우에도 거의 대부분의 국가는 이를 어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일까? 나는 이 부분에서 국제사회의 묘한 긴장감을 처음 알게 되었다.
군 복무 시절, 동맹국 장교들과 함께하는 공동 훈련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서로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달랐지만, 명확하게 통일된 기준이 있었다. 그게 바로 훈련 조약이었다. 누구도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조약은 단지 글자가 아니라, 협력하는 동안 생길 수 있는 오해와 충돌을 미연에 막는 역할을 했다. 나는 그 경험을 통해 조약이 단순히 문서를 넘어, 관계의 안정성을 위한 최소한의 보증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꼈다.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조약을 어긴다는 건 단순한 계약 위반이 아니라, 국가 신뢰 자체를 훼손하는 행위로 여겨진다. 국제 사회에서 신뢰를 잃는다는 건 곧 고립을 뜻한다. 경제적 제재, 외교적 단절, 정치적 불신이 따라온다. 그래서 많은 국가는 조약의 구속력보다 조약을 어겼을 때 감당해야 할 손해를 더 무겁게 받아들인다. 결국 조약은 종이가 아니라, 불이행에 대한 두려움을 전제로 작동하는 무언의 협박일 수도 있다.
법으로 보장되지 않아도 '공동체의 틀'이 된다
나는 국제회의 시뮬레이션에 참석해본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는 온갖 상황을 설정해 각국이 대응하는 모의 협상이 진행됐다. 참여국 대표들이 각자 자국의 입장을 주장하다가, 어느 지점에서 서로 ‘조약 형식’으로 타협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과정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서로 원하는 바는 여전히 다르지만 조약의 형식을 빌려 안정된 질서를 만들려 했다는 점이다. 조약은 누구도 완전히 만족시키지 않지만, 누구도 완전히 배제하지 않게 해 준다.
이런 구조는 실제 국제사회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작동한다. 강대국도 조약을 통해 자기 뜻을 관철시키는 동시에, 다른 나라들의 요구도 일정 부분 수용한다. 특히 다자간 협약(예: 파리기후협정, NPT 등)은 조약의 ‘형식’이 가진 신뢰 구조 덕분에 실질적인 행동을 끌어낸다. 법률처럼 구속하진 않지만, 누군가 어기면 국제 여론과 신뢰를 잃게 되는 구조다.
조약을 법으로 보는 시선은 많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을 국제사회의 ‘질서유지 장치’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강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지켜야 할 무언가. 그런 가치는 실질적인 법보다도 더 강하게 작동한다는 걸 여러 외교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조약의 힘은 법적인 위력보다, 그 안에 담긴 관계의 기대와 감시의 힘에서 비롯된다.
조약을 지키는 이유는 법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국제법 공부를 하면서, 조약의 법적 효력을 다루는 논문이나 판례를 여러 번 접했다. 그중 가장 흥미로웠던 건 조약을 ‘자발적 법의식’으로 정의한 어느 학자의 글이었다. 그에 따르면 조약은 “국가 간 신뢰가 제도화된 상태”이며, 따라서 법적 강제력보다 신뢰 상실의 위험이 조약의 실질적 구속 요인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문장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실제로 조약은 대부분의 경우 자발적으로 체결되며, 법원이 조약 이행을 명령하지 않더라도 국가는 그것을 지키려고 애쓴다. 왜일까? 국제사회에서는 단순히 이익을 넘어 ‘정상국가’로 인식되기 위한 행동 기준이 조약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선진국일수록 조약 이행 여부가 외교 평판을 좌우한다. 약속을 지키는 국가는 협상에서 신뢰를 얻고, 더 유리한 외교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는 국제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조약은 단순한 문서가 아니다. 그것은 한 나라가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공개 선언이자 행동 기준이다. 조약을 지키는 이유는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조약을 통해 스스로의 신뢰를 세우고, 공동체의 일원임을 증명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종종 법이라는 것을 규정과 처벌의 틀로만 이해한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조약은 그보다 훨씬 복합적인 장치다. 그것은 신뢰와 정치, 외교와 감정이 얽힌 복합물이며, ‘지키는 것이 이익’이라는 계산이 아닌, ‘지켜야 세계의 일원으로 남을 수 있다’는 존재론적 판단에 가깝다. 그래서 조약은 법이지만, 그 자체로도 하나의 외교 언어이고, 국가 간 관계를 평화롭게 유지시키는 가장 정중한 약속이다.